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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도 이야기 / 때때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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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6학년때까지 경남 통영의 연화도에서 살았더랬습니다. 

연화도는 옛날 사명대사가 연화도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깃대봉(*지금은 연화봉이라고 불리네요)이라는 곳 밑에 암자에서 살면서 부길재(富吉財) 라는 글자를 새겼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불교적 성향이 강한 곳입니다.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연화)이 섬이름인 것도 그렇지요.

참고: m.joongdo.co.kr/view.php?key=20160613000005078

 

연화도 판석에 적힌 '부길재(富吉財)'

 

m.joongdo.co.kr

이 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봄이면 산 딸기를 따러 산에 다니고 여름이면 온 몸이 새까맣게 수영을 했습니다. 가을이면 온 섬 전체에 생 고구마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 고구마들은 두고 두고 뺏대기 죽으로 재탄생해 긴요한 간식거리가 되었습니다. 겨울이면 매서운 바람을 이기며 구슬치기를 했고 가끔 엄마는 고대구리(?)배들로 부터 꽃게를 한 다라이(?) 사서 통째로 삶아 주셔서 저희들은 꽃게를 배터지게 먹곤 했습니다. 

고대구리 배들은 그물로 바닷 속을 훓고 지나가면서 걸리는 모든 물고기들을 싹쓰리해서 불법으로 간주되어 금지 되었습니다.

이 섬에 아마도 2008년 아니면 2009월 쯤?에 다시 가보게 되었습니다. 

항상 그리움으로 다시 찾게 만들었던 섬은 너무도 달라져 있었습니다. 어릴 때 갯지렁이를 잡고 수영을 하던 갯펄은 이미 콘트리트로 꽉 차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수많은 낚시꾼과 관광객들로 인해 한적한 바닷가 어촌 마을에는 횟집으로 가득찼습니다. 

정지용 시인의 고향 이라는 시가 이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멀리 석양아래 집집마다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면 재미있던 구슬치기, 총싸움, 불장난도 그만두고 집에 갈 때가 되던 그 평화로운 느낌이 없어졌습니다. 

초등학교도 옛 모습이 사라지고 학교를 지나 십리골이라는 곳으로 올라가니 예전의 좁은 길은 넓어지고 어마어마한 절이 있었습니다. 

연화사

연화도 꼭대기에 있던 깃대봉은 1년에 한 번가는 소풍장소였는데 이제는 길이 시원하게 뚫려 간단하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풀섶을 헤치면서 겨우 겨우 올라갔던 깃대봉(연화봉)은 이제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 되어있었네요.

연화도에 있던 어릴 때 같이 놀던 동네 형과 만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형은 밤늦게까지 제가 떠난 연화도의 변천사를 설명해 주다가 때때 아저씨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니 예전에 때때아저씨 기억나나?"

저는 두 귀를 쫑긋하고 집중했습니다.

때때 아저씨는 이장님댁에 살면서 이장님댁 일을 도와주던 아저씨였습니다. 아저씨는 말을 잘 못했고 고작하는 말이라곤 "오소오요"였습니다. 가끔 우리집에 놀러오면 부모님은 흰종이에 연필과 종이를 주며 직선을 그리도록 해보았지만 돼지꼬리만 그리던 때때 아저씨. 그 아저씨가 왜 때때 아저씨인지 또 그의 본명은 무엇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집집마다 생선, 전, 떡, 나물 냄새가 흐르는 명절이 되면, 때때아저씨는 그날만큼은 꼭 한복을 입고 웃으며 다녔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때때 아저씨를 놀려댔습니다.

"때때야 때때야!"

때때아저씨는 그런 아이들에게 웃음을 짓다가 기분 나빠하면서도 어느샌가 그 곳을 떠났고 아이들도 재미가 없어지면 장난을 그만 두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날 따라 동두 마을 아이들은(4명 정도) 때때아저씨를 심하게 놀렸습니다. 

때때 아저씨는 너무 화가 났습니다. 아이들에게 돌을 집어 던졌고 아이들은 돌을 피해 같이 돌을 던졌습니다. 화가 난 때때 아저씨는 밭일할 때 쓰던 낫을 가지고 왔습니다. 보통 성인 같으면 그냥 낫을 들고 위협하는 시늉만 할텐데 지금 이 상황에서는 누구도 때때 아저씨를 말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낫부림?이 일어날 상황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연화도 본촌, 선착장 근처에 있던 아이들은 자기집이 있는 동두마을로 달리기(빨간색 동그라미에서 초록색 동그라미쪽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는 연화도 본촌과 동두마을 사이에는 길이 좁고 40분 정도 걸리는, 공동묘지까지 있는, 먼 산길이었습니다. 

때때아저씨는 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도 뛰기 시작했습니다. 가볍게 놀림으로 시작된 도망길은 갑자기 4km 전 속력 마라톤이 되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4km가 안되지만 그 때는 십리정도 된다고 들었음) 때때 아저씨는 "오소오요" 하면서 낫을 들고 어떤 아이라도 잡히면, 한명을 죽일 기세로 뛰었습니다. 이 때 때때아저씨를 놀리던 초등학생 4명은 처음에는 웃으면서 도망갔지만 죽음의 위협에 웃음이 울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중간에 말려줄 어른도 없었습니다. 설사 어떤 어른이 있다하더라도 때때아저씨를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인생 최대의 고비에서 산길에서 만나는 딱다구리와 소쩍새의 낭만은 사치였습니다. 평소에 낮이라도 무섭게 지나왔던 공동묘지도 그 때 만큼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매일 매일 빛나는 푸른 바다를 보는 날도 그 날이 마지막일 수 있었습니다. 도망치던 6학년 형은 3학년 동생을 돌 볼 수 없었습니다. 3학년 동생은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동두마을 근처까지 뛰어왔습니다. 오르막길 내리막길 산길을 달리며 신발이 벗겨져도 다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인생 최대의 호흡을 하던 아이들은 조금만 더 가면 집으로 뛰어 들어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때때 아저씨가 멈췄습니다. 바다를 바라봅니다. 아이들은 살인적인 기운이 식어진 낌새를 느끼고 잠시 서서 때때 아저씨를 보며 숨고르기를 합니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인데, 다리가 빨리 움직입니다. 그런데 때때아저씨의 낫을 든 손은 바다로 향합니다.

"오소오요! 오소오요!"

바닷가에 죽어서 떠밀려 온 고래가 있었습니다. 처음보는 광경에 아이들도 "우와!" 소리를 쳤습니다.

"우와 저기 뭐고? 억수로 크네!"

"고래 아이가?"

"고래가 와 요 있노?"

"나도 모른다. 저리 큰 거는 고래 아이가?"

갑자기 고래 때문에 때때아저씨는 자기의 목적을 잊어버렸습니다. 아이들도 지금껏 미치게 도망가던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때때아저씨는 자신을 놀리던 아이들과 고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 마라톤 선수들 보다 빨리 뛰던 아이들은 때때아저씨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습니다. 그 날밤 그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을 잤습니다.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보낸 연화도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ㅋ

 

 

#때때아저씨 #고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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